역사 인물

안중근의사

윤정이아빠 2010. 3. 26. 08:28

 안중근 의사(독립운동가)

생몰 :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경력 : 1908년 대한의군 참모중장, 특파독립대장 
         1907년 남포 돈의학교, 삼흥학교 설립
수상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이다. 본관순흥,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이다.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 운동에 투신한 그는 1909년 10월 26일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어려서 안응칠(安膺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세례명사도 성 토마스의 이름을 딴 토마스였다.

그래서 안중근 토마스(혹은 도마 안중근)라고도 불린다. 

개요
안중근
1907년 이전에는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 계몽운동을 벌였고, 그뒤 러시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9년 초대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하얼빈[合爾濱]에서 사살했다. 본관은 순흥(順興).
초년
할아버지는 진해현감을 지낸 인수(仁壽)이며, 아버지는 진사 태훈(泰勳)이다.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의 일원이었던 아버지가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마쳤다고 한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 해주감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할 때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 진압군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한때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을 지냈다.
17세에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고 이무렵 아버지가 죽어 다시 돌아왔다.
1906년 3월에 이사한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이를 정리하고
삼흥학교(三興學校:뒤에 五學校로 개명)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천주교 계열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했다.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전쟁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군과 싸우다가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臨時査察)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의병부대의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함께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독립전쟁과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의병을 모았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이범윤을 총독, 김두성(金斗星)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참모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두만강 부근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훈련을 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그뒤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해체되었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김기룡·황병길·강기순·유치현·박봉석·백낙규·강두찬·
김백춘·김춘화·정원식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한다고
맹세했다. 9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원동보 遠東報〉와 〈대동공보 大東共報〉를 통해 이토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를 거사장소로 설정하고,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그는 하얼빈을 담당했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만철(滿鐵) 이사 다나카[田中淸太郞]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과 재판과정에서 한국의병 참모중장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거사동기를 밝혔다. 러시아 관헌의 조사를 받고 일본측에 인계되어
뤼순 감옥으로 옮겨졌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여러 차례의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했고 참모중장으로서 이토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받을 의무가 없다"라고 재판을 부정하고,
자신을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검찰에게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 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혔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관선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 유해 묻힌 감옥일대 개발바람에 파헤쳐
[서울신문]│다롄 박홍환특파원│100년 전 '그날'도 이렇게 발해만의 바닷바람은 매섭게 살을 엘
정도로 세게 불어제쳤을까?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의 뤼순(旅順)은
3월의 막바지에도 여전히 추운 겨울이었다. 마지막까지 안 의사는 '고국의 봄'을 그리워하며
찬바람이 뼈를 에는 이국 땅의 감옥에서 의연하게 최후를 맞았다. 사형집행 직전 그는 이렇게 소원했다. "내가 죽거든 뼈를 하얼빈의 공원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조국 땅으로 옮겨다오."

안 의사 압송 길을 따라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에서 밤 기차를 타고 창춘(長春),
선양(瀋陽), 다롄을 거쳐 24일 오전 도착한 뤼순의 옛 일본군 감옥은 일본 군국주의 및 제국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항일 교육장소로 바뀌어 있었다. 4m 높이의 담장이 700여m에 걸쳐 둘러쳐져
있는 수감시설 면적은 약 2만 6000㎡. 러·일전쟁 승리로 감옥을 포함, 뤼순 전체를 획득한 일본은
패망할 때까지 이곳을 주요 반일 정치범 수용시설로 활용했다. 안 의사와 이회영 선생을 비롯해
무수하게 많은 항일 열사들이 이곳에서 고문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 의사의 묘지가 항일운동의 성지로 활용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일제는 유해를 유족하게 인도하길 거부했다. 그래서 그의 유해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안 의사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담장 밖은 상당히 개발돼 있었다. 2008년 3~4월,
29일간 한국 단독으로 유해발굴 작업을 벌였던 곳은 이미 수십층짜리 고층 아파트 여러 동이 들어서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바로 옆 뤼순감옥 정북 방향 야산도 개발을 위해 모두 파헤쳐져 있었다.
만약 이곳에 유해가 있었다 해도 이미 훼손됐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이다. 담장 바로 뒤에는
항만 하역시설에 쓰이는 철골 구조물을 만드는 공장이 들어섰고, 잇대어 있는 공터에는 인근
공사장에서 일하는 농민공(농촌 출신 도시 일용직 노동자)들의 임시숙소가 세워졌다.
공장 직원 등은 안 의사 유해에 대해 무신경하게 "처음 듣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우리 측 일부 인사들이 뤼순감옥 동쪽 500여m 지점을 유해 매장 장소로 지목하고 있지만 이곳에도
이미 저층 아파트들이 많이 들어서 유해를 찾기는 어려워보였다. 우리 정부가 안 의사 유해 발굴을
위한 한·중·일 3국 간 협력을 강조하고 나선 것도 이런 현실적 여건과 무관치 않다는 판단이다.
구체적인 장소를 특정해야 그나마 발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측 사정에 밝은 한 현지 인사는 "이미 1960~70년대에 중국과 북한이 여러차례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찾지 못했다."며 "중국 측은 오래 전에 (유해 발굴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해 발굴을 둘러싸고 '내분'이 벌어지는 꼴사나운 광경도 펼쳐지고 있다. 우리 내부에서조차
어느 쪽의 유해 관련 정보도 믿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 안 의사 추모를 위해
뤼순감옥을 찾은 한 인사는 "이런 모습을 안 의사도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라며 "100주기를 계기로
안 의사의 정신을 우리 가슴에 묻는 것으로 유해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 의사는 낯선 이국 땅에서 우리 후손들에게 많은 '화두'를
던져주고 있는 셈이다. (발췌 = 서울신문에서 : 윤정이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