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경묘
준경묘(濬慶墓)는 강원도기념물 제43호이며 삼척시에 있다. 조선 태조의 5대조이며 목조의 아버지인 양무장군의 묘이다.
활기리에서 준경묘까지는 팻말을 따라 1.8km 보도 코스이다. 묘역까지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지지만 차단기가
굳게 내려져 있어 걸어야 한다. 고갯마루를 넘어서면서 울창한 송림이 모습을 드러내고 동녘을 향해서는 활엽수가
빽빽하게 비포장길에 그늘을 만들어준다. [1] 고종 광무 3년(1899)에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건축하였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산자수려한 곳이다.이 곳의 낙락장송인 황장목들은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목조가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으로 양친을 안장한 뒤, 5대에 이르러 조선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준경묘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4㎞ 떨어진 곳에 목조의 어머니 이씨의 묘인 영경묘 (강원도기념물 제43호)가 있다.(옮겨온글 : 이외태)
준경묘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준경묘는 삼척 피난시에 돌아가신 양무장군(이안사의 부친)의 묘이다.
이안사는 삼척에서
부친상을 당하여 묘 자리를 구하려고 이산 저산을 뒤지면서 여러 곳을 살펴보았지만
마땅한 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마침 활기리 노동 산마루에 이르러 잠시 쉬고 있는데
어느 도승이 제자와 함께 지나가면서 한 곳을 가리키며 "대지로다!" 감탄을 하면서
"이곳에 장사를 지내려면 소 백 마리를 잡아 장사지내고, 필히 황금관을 하여야 5대손 때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나라를 새로 세울 수 있는 창업주가 될 것이다."하고는 사라져 갔다.
이안사가 그 자리를 유심히 보았다가 아버지를 그곳에 장사지냈는데,
소 백 마리 대신 흰소(白牛) 한(一)마리를, 황금관 대신 귀리 짚을 감싸 궁여지책으로 장사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후 전주 지주사였던 자가 다시 삼척으로 부임해오자
이를 피하여 부랴부랴 가재도구를 꾸려 함경도 덕원 땅 남면 용주리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거기서 5대손 이성계가 나와 조선을 건국하였으니 이 묘를 왕후지지라 한다.
전주의 조경단과 삼척의 준경묘를 비교해 보면 조경단은 용맥이 사납지 않으나 단호하고,
내청룡, 내백호가 튼튼하며, 준경묘는 높고 험한 산속에 괴기혈로
웅장하게 자리 잡은 속내를 감추운 비장함이 있고, 청룡, 백호가 우람하며, 구곡지수의 왕후지지라 할만하다.
이러한 조상들의 비장함이 한 왕조를 이룩한
이성계를 탄생시켰고, 오늘날 240만명 정도 되는 전주이씨들을 있게 한 근원이 되었다.
종묘 : 우리나라의 제례는 4代奉祀로 시조와
직계조상 4대까지의 위패 즉 5분의 신위를 모시는 제도인 오묘제(五廟制)를 채택하고 있다.
一代를 30년으로 잡아 120년 동안 조상의 혼을 모시는 의례인 것이다.
家廟에서와 마찬가지로 宗廟도 원칙적으로는 오묘제를 따르면서,
후에 지대한 공과 덕이 있거나
나라를 환란에서 구한 왕들을 계속 모시는 불천지주(不遷位) 제도를 마련하였다.
사가에서는 먼저 돌아가신 조상의 위패를 모셔 놓고 제사를 드리는 곳
즉 조상신전(祖上神殿)을 가리키며 가묘(家廟) 또는 사당이라고 하며, 왕실의 조상신전을 종묘라 한다.
국가를 이룩하면 가장먼저 하는 일이
종묘와 사직(社稷-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드리는곳)을 세우는 일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개경에 옛 고려의 종묘를 헐고 그 자리에 종묘를 세웠으나,
태조3년(1394) 10월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한양 도성 동쪽에 종묘를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 하였으며,
곧이어 개경의 종묘를 폐지하고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한양으로 모셨다.
세종1년에 정종이 승하하시고, 삼년상을 치루었는데 종묘에는
이미 태조와 네분의 추상왕의 신위가 모셔져 있으므로 신위를 옮기는 별묘인 영녕전을 종묘 옆에 짓게 된다.
그리고 우선 목조의 신위만을 영년전으로 모시게 된다.
세종이후 조선왕조의 종묘에서는 西上法을 채택하여 신주를 봉안하였다.
신전의 향 좌측(서쪽) 제1실에
시조의 신주를 모시고 차례로 동쪽으로 제1세, 2세, 3세, 4세의 순서로 신주를 봉안하였다.
5세 조상의 신주를 새로 부묘하려면 시조는
불천위이니 옮길 수 없으므로 1세의 신주만 별묘인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나서 2세 이하 4세까지의 신주를
서쪽 즉 좌로 이동이켜 모시고 4세의 신실에 5세의 신주를 새로 봉안하는 방법이다.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
주를 모신 종묘(正殿)는 처음 7칸으로 시작하였으나 명종, 영조, 헌종대에 4칸씩 증축되어 19칸이 되었다.
그 모셔진 순서는 제1실 태조, 2실 태종, 3실 세종, 4실 세조,
5실 성종, 6실 중종, 7실 선조, 8실 인조, 9실 효종, 10실 현종, 11실 숙종, 12실 영조, 13실 정조, 14실 순조,
15실 문조, 16실 헌종, 17실 철종, 18실 고종, 19실 순종과 그의 왕비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영년전은 16칸으로 西夾室 제1실 정종, 2실 문종, 3실 단종, 4실 덕종, 5실 예종, 6실 인종,
四祖殿 1실 목조, 2실 익조, 3실 도종, 4실 환조, 東夾室 1실 명종, 2실 원종, 3실 경종 4실 진종,
5실 장조, 6실 영친왕과 그의 왕비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즉 왕위에 있었던 임금 27명중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25명의 왕과
추존된 임금 9분(목조, 익조, 도조, 환조, 덕종, 원종, 진종, 장종, 익종)과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공의 신주만이 종묘에 모셔졌다.
1989년에 돌아가신 이방자 여사의 신주가 영년전 영친왕 옆에
모셔짐으로써 조선의 종묘는 자리를 마감하여 현재의 왕세손 이구(李玖)씨는 종묘에 들지 못한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생각된다.
종묘의 주산은 백악의 동쪽에 위치한 응봉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을 만들고 一脈이 종묘로 이어지는데,
안산은 가산을 만들어
종묘 전체를 감쌓게하여 오로지 하늘로만 통하는 신선한 공간을 만들려고 하였다.
태조3년 종묘의 입지와 좌향을 정할때에 실록에 의하면
“ 坎방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壬坐丙向에 종묘의 터를 정하였다” 고 하였는데 현재의 좌향은 丑坐 未向이다.
임진왜란때 불탄 종묘를 선조말년에 복원하여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완공하였으니 재건 당시 좌향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용맥에 따라 丑坐 未向 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조상들은 불편하더라도 자연의 상태를 보존하고자 창경궁에서 종묘를 돌아
창경궁으로 다녔으나, 일제 때에 편리함을 위하여 창덕궁 앞으로 도로를 내었다. 현재의 율곡로이다.
일제는 도로를 내기 위해 혹은 용맥을 자르기 위해 길을 냈다 하더라도,
현재의 우리는 일제보다 더 심한 자연훼손을 하고 있으니 누구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편리함이 우선인가, 자연의 기운을 보존함이 우선인가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판단일 따름이다.
종묘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 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에 관한 협약>에 의거해 및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될 만큼
종묘의 건축물과 종묘제례는 뛰어나다.우리의 조상들은 훌륭한 문화와 문화유산을 후손에게 남겼다.
우리는 과연 조상들이 물려준 그 유산을 잘 보호하고 있는가?
지금 종묘에 가 보면, 종묘공원은 노숙자들의 집합소요,
입구의 화장실은 냄새가 진동하고, 지하에 주차장을 만들어 어정은 물이 말랐다.
조선시대에는 종묘(正殿)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납일(동지가 지난 뒤 세 번째 戊日)에 대향을 지냈으나
현재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을 정하여 종묘제례라는 제향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이때에 이구(李玖)씨의 수양 아들로 점지된 왕세손(王世孫)을
초헌관(初獻官)으로 모시고, 종친 중에서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이 나와 제사를 올린다.
종묘제례는 세계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을 만큼 살아있는 우리나라의 유산이다. (옮겨온 글)
2012년 4월 15일(강원도 여행중 준경묘에서)윤정이아빠
음 악 : Epitaph - King Crim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