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독일마을
** 독일마을은 1960~1970년대 어려운 시기에 독일에 광부, 간호사로 파견되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헌신한 독일거주 교포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조국의 따뜻한 정을 느끼며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2000년부터 2006년간에 걸쳐 남해군이 조성한 교포정착촌 마을이다.
독일마을은 천연기념물 제150호인 물건리방조어부림을 바라보며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와
봉화리 일대 약 90,000㎡의 부지에 걸쳐 조성되어 있으며, 독일 교포들은 분양받은 대지에
직접 독일에서 건축자재를 가져와 빨간 지붕과 하얀 벽돌을 이용한 전통적인 독일양식으로
주택을 건립하여 현제 34동의 주택이 완공되어 있다... (옮겨온 글 : 이외태)
"이 영상은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그것을 극복해야하는
운명으로 살아야 했던 1960년대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이야기입니다"로 시작된다.
영상 속에는 광부들이 탄광에서 일하는 장면,
일을 마치고 나서 탄가루로 새까맣게 변한 얼굴을 씻는 장면이 나온다.
얼굴에 묻은 새까만 탄가루를 씻어내는 장면, 탄광 안에서 70여명이나
목숨을 잃었다는 그런 장면들은 파독의 역사를 왜 `청춘`이라 했으며,
왜 `독일아리랑`이라고 했는지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힘들기는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간호사들은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
시신을 닦는 일 등 무조건 허드렛일만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독일인들은 한국의 간호사들이 정말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을 한국인 천사(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런 귀중한 영상자료들을
잘 보관해온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해군은 이러한 자료들을 모으기 위해 국가기록관, 독일대사관, 사단법인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
사단법인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등의 협조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전시하고 있는 물품이나 자료들 중
상당수는 독일마을 주민들이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파독전시관을 지었기 때문에 이런 기록물들이
멸실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 흘리게 하는 이야기
독일로부터 1억 5000만마르크(약45억원)의
상업차관 약정을 받아낸 것은 장면 정부 때다.
당시 우리나라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태국의 국민소득이 220달러,
필리핀이 170달러일 때 우리나라는 고작 76달러에 불과했다.
일자리를 구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었다.
장면 정부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독일에 상업차관을 부탁했다.
전후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경제부흥의 시기여서
소위 광부나 간호사 등 힘든 직종의 인력이 필요했다.
독일은 상업차관을 주면서 광부 간호사들을 요청했다.
이것이 파독의 역사적 배경이다.
파독기념관에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우리는 7936명의 광부를 파견하고
1960년부터 1976년까지 1만 1057명의 간호사를 독일로 파견했다.
이들이 고국으로 보낸 송금액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무려 총 1억153만 달러이다.
이중 1965년, 1966년, 1967년 송금액은
국내 총 수출액 대비 1.6%, 1.9% 1.8%에 해당한다.
외화가득률이 100%에 해당하는
임금이라는 점과 단 1달러의 외화도 소중했던
당시 경제상황에서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땀과 눈물은 한국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독일마을의 역사성을 보다
독일마을이 남해에 입지하게 된 배경이 되는 파독의 역사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장으로 기록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파독 간호사와 광부들은 개인적으로 보면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이역만리까지 가서 고생을 한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정부가 상업차관을 빌려오기 위해 담보를 제공한 것이고,
그들이 힘들게 벌어
고국으로 송금한 외화는 말 그대로 한국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므로 독일마을은 그저 단순한 동포의 마을이 아니다.
우리 군민들이 소중하게 여기고 지켜가야 할 국가적 역사적 명소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남해군이라는 작은 지자체가 해낸 것이 자랑스럽다.
이후에 지어진 미국마을이나 앞으로 지으려고 하는
일본마을과는 차원이 다른 역사적 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독일마을은 독일마을다운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파독기념관은 독일마을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2018년 5월 12일(부부동반 남해 독일마을에서)윤정이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