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스토리

법정(法頂) 스님의 미리 쓴 유서(遺書)

윤정이아빠 2010. 3. 24. 16:38

 법정(法頂) 스님의 미리 쓴 유서(遺書)
죽게 되면 말없이 죽을 것이지 무슨 구구한 이유가 따를 것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지레 죽는 사람이라면 의견서(유서) 라도
첨부되어야 하겠지만 제 명대로 살만치 살다가 가는사람에겐

그변명이 소용될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때 나를 찾아올는지 알 수 없는 일. 그 많은
교통사고와 가스 중독과 그리고 증오의 눈길이 전생의 갚음으로
라도 나를 쏠는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죽음 쪽에서 보면 한걸음 한걸음
죽어오고 있다는 것임을 상기할 때, 사는 일은 곧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네! 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
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유서는 남기는 글이기보다 지금 살고 있는
″생의 백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육신으로는 일회적일 수 밖에 없는 죽음을 당해서도
실제로는 유서같은 걸 남길만한 처지가 못 되기 때문에 편집자의
청탁에 산책하는 기분으로 따라 나선 것이다.

누구를 부를까? (유서에는 누구를 부르던데) 아무도 없다. 철저
하게 혼자였으니까. 설사 지금껏 귀의해 섬겨온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

이 세상에 올 때에도 혼자서 왔고 갈 때에도 나 혼자서 갈 수 밖에
없으니까.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일상의 지평을 걸어 왔고
또 그렇게 걸어 갈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리 없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 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한술 더 떠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 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 하기는 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간단 명료한 것을 즐기는 성미이니까. 내게 무덤 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거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부터 좋아 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 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 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 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 되지 않은 곳이라면 아무 데서나 다비해도 무방하다. 사리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꼭 한군데 있다.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 의자의 위치만 옮겨놓으면 하루 에도 해 지는 광경을 몇번이고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는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별로 없을 것이므로 가보고 싶다. 그리고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대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다시 출가 사문이 되어 금생에 못다한 일들을 하고 싶다. - 글 / 법정(法頂) 스님 -
 
대여섯명인 우리는 그 엿장수를 둘러싸고 엿가락을 고르는 체하면서 적지 않은 엿을 슬쩍슬쩍 빼돌렸다. 돈은 서너 가락치 밖에 내지 않았었다. 불구인 그는 그런 영문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일이, 돌이킬 수 없는 이 일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가 만약 넉살 좋고 건강한 엿장수였다면 나는 벌써 그런 일을 잊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에 기억이 지워
지지 않은 채 자책은 더욱 생생하다.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허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허물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그 때 저지른 그 허물이 줄곧 그림자처럼 나를 ?i고 있다. 다음 세상에서는 다시는 이런 후회스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며 참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살아 생전에 받았던 배신이나 모함도 그 때 한 인간의 순박한 선의지를 저버린 과보라 생각하면 능히 견딜만한 것이다. "날카로운 면도날은 밟고 가기 어렵나니, 현자가 이르기를 구원을 얻는 길 또한 이같이 어려우니라." <우파니 샤드> 의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음으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본래 무일푼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관념이니까.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책이 내 머리밭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과 서로 의지해서 살고 있다.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생명자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이므로 인간은 저마다 혼자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보라빛 노을같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의 당당하고 본질적인 실존이다. 고리를 뚫고 환희의 세계로 지향한 베토벤도 말한 바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지 이것 밖에는 인간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온갖 모순과 갈등과 증오와 살육으로 뒤범벅이 된 이 어두운 인간의 촌락에 오늘도 해가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그 선의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내가 할 일은 먼저 인간의 선의지를 져버린 일에 대한 참회다. 이웃의 선의지에 대하여 내가 어리석은 탓으로 저지른 허물을 참회 하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다. 때로는 큰 허물보다 작은 허물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다. 허물이란 너무 크면 그 무게에 짓눌려 참회의 눈이 멀어 버리고 작을 때에만 기억에 남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지독한 위선일는지 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두고 한 가지 일로 해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자책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문득문득 나를 부끄럽고 괴롭게 채찍질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동무들과 어울려 집으로 돌아 오던 길에서 였다. 엿장수가 엿판을 내려놓고 땀을 들이고 있었다. 그 엿장수는 교문 밖에서도 가끔 볼 수 있으리만큼 낯익은 사람인데, 그는 팔 하나와 말을 더듬는 장애자였다.    옮겨온 글 : 윤정이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