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산행기

경남 산청 구형왕릉

윤정이아빠 2015. 8. 25. 15:20

     ☞ 사적 제214호인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은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에 있다.
       구형왕릉 앞에 전(傳)자가 붙은 이유는 그의 능이라는 확증이 없고,
       단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야의 마지막 왕인 제10대 구형왕이 묻혀있다는 (전)구형왕릉은

   일반 왕능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형태로서  무엇보다도 돌로 쌓은
   석총(돌무덤)이라는 점이 관심을 끈다.구형왕릉은 일반 무덤과는 달리

   가파른 산비탈에 주변의 막돌과 깬돌을 계단식으로 층층이 쌓아올렸으며, 
   총 높이 7.15m, 둘레가100여m나 되는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그 정상의 네모진 단 위에는 봉토분처럼 뒷산과 언덕으로 연결되고

    모서리가 약간 살아있는  반구형(半球形) 봉분(封墳)을 만들었다.

   즉 정상에 반구형 접시가 엎어져있으며, 그 아래 7단으로 형성된

   피라미드가 산비탈에 묻혀있어 반 정도만 드러나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피라미드형 적석총(積石塚)은 제1단의 너비가 약 20m 정도되며,

   1m 남짓한 높이로 7단을 쌓았고 전체 높이는 7.15m이다 ,

    4단 중앙에는 높이 40cm, 깊이 68cm, 너비 40cm의 감실이 설치되어 있지만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고 이것이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능의 각 층을 옆에서 보면 거의 일직선이 되게끔 정연(整然)하게 보이나,
   멀리 위에서 내려다 보면 모서리가 아래로 쳐져있다.

    아마 오랜 세월동안에 양쪽 가장자리가 밀려내려온 것이 아닐까싶다

   이 석단은 앞에서 보면 7단인데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때문에 평지에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앞에서 보았을 때는 층층이 쌓아올리고 윗단으로 갈수록 좁혀져 있기에

   계단식 피라미드처럼 보이나 옆에서 보면 피라미드형이라 할 수가 없으며,

   안동석탑리 적석탑이나 의성석탑리 방단형적석탑에서의 피라미드 모양과는

   완연한 차이를 보인다 구형왕릉 앞면 중앙에는 가락국 양왕릉이라는

   비석이 서 있고, 1m정도의 돌로 쌓은 담이 이 석총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또한 문인석, 무인석, 석수(동짐승), 상석, 장명 등이 1쌍씩 배치되어 있으나 

   이 석물들은 왕릉을 쌓았을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래에 김해 김씨 문중에서 민들어 세운 것이다.

   '주변의 등나무와 칡넝쿨이 왕릉으로 뻗지 못하고,

   이끼나 풀이 자라지 않으며 위로는 까마귀와 참새가 날지 않는다고 한다'는

   능참봉의 말은 왕릉의 신비로움을 더해주려는 후손들의 염원이라라.

   구형왕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장군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야국의 왕으로 올라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구형왕은 밀양의 이궁대에서 신라 법흥왕에게 선양의 절차를 마친 뒤

   (가락국 기원으로는 491년) 낙동강을 지나 이곳 왕산의 태왕궁으로  들어와 은거하다

   5년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을 인용한 “가락국2000년사”에 기록돼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紀異篇) 가락국기(駕洛國記)'를 보면,

   구형왕은 제10대 가락국의 왕으로서 서기 532년 신라(新羅)

   제23대 법흥왕(法興王)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상대적으로
   열세(劣勢)인 구형왕이 항복하여 사신(使臣)과 왕자(王子)를 신라로 보내었다.

   이 때 구형왕이 전쟁을 치르지도 않고 왕위(王位)를 양보했다하여

   양왕(讓王)이라고도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형왕이 많은 백성이 화를 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나라를 스스로

   넘겨 주었기 때문에 훗날 그의 후손인 김유신장군이 신라에서

   큰 유업을 달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구형왕의 아들은 무력장군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의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기여한 바가 매우 컸다.

   진흥왕 당시의 뛰어난 전공으로 창녕의 “진흥왕척경비”에
   왕의 측근 배신으로 이름이 새겨져 있을 만큼 그의 위치는 뚜렸했다.

   구형왕의 손자이며 무력장군의 아들인 서현은 왕도 경주의 길목을 지키는

   양주(지금의 양산 울산 동래등지)도독으로 큰 역할을 수행 했는데

   부인은 진흥왕의 조카 만명부인이다. '서현'과 '만명'이 바로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은 청년시절

   화랑도를 이끌고 증조부의 왕능을 지키면서 지리산 일원에서 호연지기를 키워

   훗날 삼국통일의 주역이 된것이다. 통일신라의 주역으로

   활약한 후손들의 선조인 구형왕은 5년간의 지리산 칩거 생활후

   쓸쓸한 최후를 맞고 왕산 기슭의 돌무덤의 주인공이 됐다고 전해오고 있다.

   구형왕릉의 무덤을 둘러싸고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석탑’이라는 설(說)과 ‘왕릉’이라는 설이다.(옮겨온 글)

                                 2015년 8월 23일(경남 산청 구형왕릉에서)윤정이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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