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던 장생포에 국내 유일의 고래박물관을 건립하여 1986년 포경이 금지된 이래
사라져가는 포경유물을 수집, 보존·전시하고 고래와 관련된 각종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해양생태계 및
교육연구 체험공간을 제공하여 해양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설립을 하였다. (옮겨온 글 : 이외태)
장생포 고래잡이 역사를 살펴보면 1891년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태평양어업 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그 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포경업을 독점하여
전국에 있는 포경기지를 정비하면서 장생포가 포경업의 중심지로 주목되었다.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에 의해 운영되던 회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액 공동출자한 조선포경 주식회사 설립으로
이때부터 우리나라 포경의 역사가 시작된것이다.
1970년대 말 고래잡이가 전성기를 이룬 시기에
장생포는20여척의 포경선과 1만여 명의 인구가 상주하는 큰 마을이었지만,
1980년에 이르러 무분별한 포경으로 포획량이 줄고 일부 종의 멸종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상업포경 금지를 결정하면서 고래잡이가 중단되고,
그 후 인근에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포경에 종사한 주민 대부분이 이주하여 마을은 점점 쇠퇴하게 되었다.
장생포의 고래잡이가 한창이던 70, 80년대 6천5백여명에
이르던 주민 수가 현재는 3천명 정도로 줄었다.
지금은 울산광역시에서
장생포의 고래잡이가 울산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이라고 판단,
울산의 지역문화와 연계시키려는 여러 가지 노력을 해 나가고 있다.
장생포의 고래잡이 어민들은 생명을 걸고 고래잡이를 해야하므로
여러 가지 사고를 막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출항과 입항시에 꼭 제사를 지내왔다.
고래를 잡으러 바다로 떠나기 전, 무탈하게 고래를 많이 잡을 수 있게
마을의 조상신이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출항의식인 ‘당산제’와
고래를 잡고 장생포로 돌아 왔을 때 치르는 입항의식인 ‘풍경제’를 지냈다.
당산제는 마을 사람들의 연중무병과 평온무사를 비는 제사로
장소는 보통 마을 입구에 있는 제단이나 별도로 마련된 사당에서 지냈으며,
지금도 매년 행하고 있다. 제단은 청결하게 하고 주변에
황토를 깔아 놓으며 솔가지를 끼운금줄을 쳐 잡신의 출입을 막았다.
제주는 마을 사람들 중에서 연로하고 상중에 있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
제주는 1주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육류를 먹지 않으며 상인이나 병자를 만나지 않았다.
제삿날은 운수가 길한 날을 택하여 제물은 전날 차려놓고
제삿날 자시에 동신제문을 읽으면서 시작했다.
사가 끝나면 굿을 하고 제사음식과 술을 나누어 먹으면서
마을사람 전체가 참여하여 음복하고, 신인합일적인 향연이라는데 의의를 두었다.
풍경제는 고래잡이 입항 시기인 음력 10월 5일에 치루어지던 행사로
풍성한 고래 수확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의로 지금은 매년 지내지는 않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온 울산의 오랜 전통산업이 포경산업이었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울산의 근대 포경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899년 러시아가 태평양 연안에서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포경기지로
울산의 장생포를 지정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고래잡이가 시작되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 포경회사들이 고래를 잡아 왔으나, 해방 후 조선 포경주식회사가
최초 설립되면서 우리의 손(힘)으로 고래를 잡기 시작하게 되었다.
고래의 포획은 5월부터 12월까지는 동해의 가원도 묵호, 북변 근해를 주 어장으로 하였고,
12월부터 4월까지는 서해의 어청도 근해를 주 어장으로 하여 포경활동을 하였다.
1985년 당시까지 포경선이 잡은 고래의 수는 연평균 900마리였고
주로 밍크고래를 잡았다.그러나, 1982년 7월 국제포경위원회<IWC>제34차 총회에서
고래 자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업 포경을 전면 금지하는 의안이 가결되어
우리나라 유일의 장생포에서도 고래잡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옮겨온 글)
2016년 1월 1일(울산 장생포 고래박물관에서)윤정이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