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산행기

해인사

윤정이아빠 2015. 12. 27. 20:12

 **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그 도도한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을 확충하고 선양한다는 기치 아래,

     이른 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화엄종의 근본 경전인 화엄경은 4세기 무렵에 중앙아시아에서 성립된 대승 경전의 최고봉으로서,

     그 본디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며 동양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진다.  

     이 경전에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해인사 이름은 바로 이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

     해인삼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한 없이 깊고 넓은 큰 바다에 비유하여, 거친 파도 곧 중생의 번뇌 망상이

     비로소 멈출 때 우주의 갖가지 참된 모습이 그대로 물 속에(海)에 비치는(印)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여실如實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의 모습이요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니,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인사는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의 법손인

    순응順應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理貞화상이 신라 제40대 임금 애장왕 3년에, 곧, 서기 802년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적광전에 자리에 창건하였다.
    이리하여 화엄종은 개화기를 맞던 신라시대를 거쳐, 해인사를 중심으로, 희랑希朗대사를 위시하여

    균여均如, 의천義天과 같은 빼어난 학승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른다.
   
해인사는 한국불교의 성지이며 또한 세계문화유산 및 국보 보물 등 70여 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국내 최대 사찰로서 명산인 가야산 자락에 위치하여, 가야산을 뒤로하고 매화산을 앞에 두고 있어

    그 웅장한 모습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경의로울 뿐 아니라  송림과 산사가 어울어져 연출하는 설경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경에 젖게 한다. (옮겨온 글 : 이외태)

   해인사는 신라 40대 애장왕 3년(802년)에 왕비의 불치병을 고쳐준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화상과 그 제자인 이정화상에 대한 보답으로

   지금의 대적광전 자리에 화엄경을 중심 사상으로 하여 창건되었다.

   거의 모든 절이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 대신에 화엄경전 상의 주불인 비로자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다.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인

   바이로차나(Vairocana)에서 온 말로서 ‘영원한 법’ 곧 진리를 상징한다.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신 대적광전은

   부처님의 진리의 몸인 화엄경을 언제나 두루 설하는 대적광토의 역할을 하고 있다.

   대적광전은 마하비로자나불을 봉안한 불전으로 대광명전,

   대적전, 비로전, 화엄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대적광전의 적광(寂光)은 번뇌를 끊고

   적정(寂靜)한 자리에서 발하는 진지광명(眞智光明)을 의미한다.

   대적광전은 때로 광(光)자를 뺀 대적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적(大寂)이란 여래가 일체의 산란한 마음을 여의고 드는 선정을 의미한다.

   비로자나불을 모셨으나
   주불전이 아닌 경우에는 비로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때로 화엄전으로 칭하기도 하는 것은 비로자나불이 화엄장세계의 교주이기 때문이다.

   대적광전은 성종 때에 크게 확장된
   해인사는 임진왜란(1592-8년) 때도 전화(戰禍)를 면했다.

   1695년(숙종 21)부터 일곱 차례나 크고 작은 화재를 입는다.

   그 중에서도 1817년(순조 17)에 난 불이 가장 컸다. 

   이 화재로 판전을 제외한 수백칸의 건물이 모두 타버렸다.

   그 때의 관찰사 김노경(金魯敬 1766-1840)이

   계획을 세우고 영월(影月)·연월(淵月)·제월(霽月) 스님이 중건하였으나

   전날의 규모를 그대로 복구하지는 못하였다.

   지금의 대적광전도 18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8년 중건한 건물이다.

    대적광전을 중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김노경의 공덕비가 해인사 입구 길상탑 부근 비석거리에 있다.

   비문에는 중건 내용이 적혀 있다. 김노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인

   1817년 2월 1일 해인사는 장경판전을 제외하고 전소되었다.

   이 때 김노경이 희사한 사재 일만냥 경상도 70여 현의 군수들로부터

   모금한 일만냥 또 합천군수 서봉보(徐鳳輔)가 낸 일천냥
   그리고 해인사 스님들과 신도들이 낸 성금으로 해인사는 완전히복구되었다.

   대공덕주 김노경의 공덕비는 1821년 여름에 세웠다.

   김노경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아버지다.

   김노경은 아들 김정희로 하여금 시주를 권하는
   <해인사중건권선문海印寺重建勸善文>을 1817년 쓰게 하였다.

   이듬해에는 대적광전이 완공되자
   <가야산해인사중건상량문伽倻山海印寺重建上樑文>을 짓도록 하였다.

   이 상량문은 1961년 보수공사 때 들보에서 나왔다.

   가로 485cm, 세로 94cm 크기의 감청색 비단에

   자경(字徑) 3cm 크기의 금니(金泥)로 1행에 20자씩 67행을 중후한 해서체로 쓴 상량문이다.

   추사는 《법화경》의 <화성유품化城喩品>과 《아미타경》에 나오는

   부처님들 이름을 상량문 끝에 붙이는

   육위사(六偉詞)에 포함하여 노래함으로써 화재를 진압하기를 기원하였다

   대적광전 사면에는 각기 이름을 새겨 넣은 편액이 있다.

   해인사(海印寺)는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중턱에 있는 사찰이다.

   세계기록유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150여 개의 말사(末寺)를 거느리고 있다.

   불교의 삼보(三寶) 사찰 중 법보(法寶) 사찰로 유명하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본존불은 석가모니이다.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했다.

   추사는 《법화경》의 <화성유품化城喩品>과 《아미타경》에 나오는 부처님들 이름을

   상량문 끝에 붙이는 육위사(六偉詞)에 포함하여 노래함으로써 화재를 진압하기를 기원하였다

   대적광전 사면에는 각기 이름을 새겨 넣은 편액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150여 개의 말사(末寺)를 거느리고 있다.

   불교의 삼보(三寶) 사찰 중 법보(法寶) 사찰로 유명하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본존불은 석가모니이다.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했다.

   그들은 가야산에 초막을 세우고 참선을 했는데

   등창으로 고생하던 애장왕의 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어 애장왕이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

   순응과 이정 이후

   결언대덕(決言大德)이란 승려가 사찰 창건을 계속했고 주지가 되었다.

   918년에는 승통 희랑(僧統希朗)이라는 당시 해인사 주지가

   고려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고려 태조가 국찰(國刹)로 삼았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교장(敎藏)의 간행을 시도한 곳이다.
   해인사는 5차례가 넘는 화재로 인해 여러 번 중창되었으며, 그에 따라 창건 당시의

   건축은 알 수 없고, 현재의 전각은 대부분 조선 말기 때의 것이며, 3층 석탑·석등 등이 현존한다.
          

   조선 성종 12년(1481년) 이후 8년간 중건하였고,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국보로지정된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에는 유명한 고려대장경

   (高麗大藏經)이 보관되어 있다.해인사는 1993년에 성철 스님이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2015년 12월 27일(합천 해인사에서)윤정이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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