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드리

가덕도 외양포

윤정이아빠 2018. 2. 26. 14:55

** 외양포 마을은 원래 양천 허씨 집성촌이었다. 외양포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16세기 무렵이었고,

    당시 약 80호 정도가 거주하였다 한다. 지금은 외양포가 대항동 대항 마을 아래의 자연 마을이지만,

    애초는 대항 마을보다 더 큰 마을이었다...(옮긴 글 : 이외태)

    '부산'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대한민국 제2의 수도? 두 번째라는 숫자가 불편하다면

  대한민국 해양수도 쯤으로 풀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수식어가 먼저 떠올랐다면

 그건 당신이 부산을 한 번도 찾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이라도 부산을 제대로 맛 봤다면

  그가 품은 '특별한 무언가'를 눈치 챘을 테니까.

  해양수도 말고도 그를 설명할 수식어는 차고 넘친다.

  1904년, 조용한 어촌마을 가덕도 외양포에 진해만 요새 사령부가 들어섰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쫓아내고 마을 전체를 병영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사라졌지만 포진지터와

 군부대 흔적은 생채기처럼 또 아무렇지도 않게 마을에 남아있다.

  대한해협과 진해만 사이에 자리한 섬의 숙명 섬나라 일본은 한반도를 탐냈다.

  갖지 못한 뭍에 대한 열망 그리고 필요 때문이었으리라

  섬에서의 노곤한 생존을 떠올리면 침략과 수탈로

  얼룩진 한반도의 역사가 조금은 이해하기 쉬워질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침략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왜구는 지독히도 한반도를 못살게 굴었다.

 특히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반도 남쪽 지역의 피해가 컸다.

  아예 섬을 비워버린 공도정책 역시 왜구들의 공이 혁혁하다.

  한반도 전체를 초토화시킨 임진왜란과 더불어

  남도의 섬들이 겪은 피해는 셀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해양수도를 표방하는 부산지역에

  2014년 말 처음으로 버스가 들어간 외진 마을이 있다.

   아직 국유지인 터라 건물의 증․개축이 제한되어 한 지붕 아래  

  2~3가구가 살아가는 곳이긴 하지만 최근 해군군사지역에서 해제되었다.

  바로 강서구 가덕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대항동 외양포이다.

  이런 연유 때문일까.

  100여 년 전에 일제가 구축한 포진지의 흔적들이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다. 

  외양포 마을의 포진지는 1904년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구축한 군사기지이다.

  현재에는 ‘사령부발상지지(司令部發祥之地)’라는 비석과 함께 포대,

  사령관 관사, 장교관사, 포병 막사, 위병소, 탄약고 등 창고와 더불어 포대진지,

  우물 등의 시설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1936년 6월에 세운 비석에는 1905년 4월 사령부의 설치를 명령받았다고 한다.

  조선주둔군사령관 우츠노미야(宇都宮)가 보낸 전문에 따르면,

  외양포 포대진지의 구축은 러일전쟁이 발발하는

  1904년 2월 직전부터 이미 발틱함대라 불리던

  러시아북양함대의 대한해협 통과를 저지할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같은 해에는 외양포마을의 토지와 가옥을 강제로 매수하고,

   제3임시축성단이 12월까지

  포대사령부, 군 막사, 포대진지 등의 구축을 완료하였다.

  공사가 일단락된 직후에는 일본군 포병대대본부가 옮겨오고

  이듬해에는 진해만요새사령부가 상륙하였다. 이후 1939년까지도 관측소,

  지하벙커, 땅굴 등 일부의 시설이 새로 만들어지고 기존 시설들이 정비되면서

  태평양전쟁에 따른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대비한 방어시설로 전환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포병 요새의 구축으로 외양포에서 강제 이주된 주민들과

  그 후손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나

  전 지역이 국방부 소유로 귀속되어 지금도 국유지로 묶여 있는 상태이다.

  때문에 외양포마을은 1904년 이래 일제강점기의 침탈과

  전쟁의 아픈 흔적을 그대로 안고 100여 년 전의 시간적 공간에 머물러 있다. 

  최근에는 부산신항의 개발과 관련하여

  가덕도 역사 문화관광단지의 조성이 기획되고 있으므로,

  외양포마을의 역사․문화적 흔적이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도 갖는다.

  가덕도의 대항동 새바지마을 해안에도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I․T자 형태의 인공동굴 20여 개가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말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저지할 목적으로

  강원도의 석탄채굴 광부들을 징발하여 만든 요새라 한다.

  또한 천성마을의 서쪽 산 위에도 사령관관저 터의 흔적이 있다. 

  이처럼 일제가 가덕도에 해상방어 군사시설을 설치한 연유는

  이 지역이 우리나라와 일본 간의 해상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는 조선시대부터 이미 가덕진성․천성진성 등의 해상방어 군사시설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눌차왜성 등이 위치하는 등 해상군사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강서구 대저동 신평마을에도 1940년대 일본이

  칠점산의 봉우리 등을 허물고 만든 군용 비행기 활주로와 불어 격납고 등이 남아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격납고는 가정집․창고․공장 등의 건물로 개조되어

  사용되는 등 역사․문화의 변형적흔적을 찾아볼수있다.그리고 남구 용호동에도

   1930년대와 1940년대 일제가 구축한 지하 진지가 남아있다.

2018년 2월11일(부산 가덕도 외양포에서)윤정이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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